2025밀양은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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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기획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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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미식학과] 현장에서 만나는 생태미식

지역의 맛을 따라 걷는 배움의 길

하루 먼저 밀양에 도착해 함께 들를 곳들을 미리 둘러보고, 잠에 들기 전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내일의 여정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어떤 경험이 될까, 한 번 하고 끝나는 소비적인 체험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질문을 안고 오늘을 맞이했습니다. 여정의 시작, 오연정에서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아름다운 햇살을 맞이합니다. 좋은 날씨 속에서 밝은 웃음으로 문을 넘어 걸어오시는 생태미식학과 벗님들의 표정에서 좋은 예감을 발견합니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라도 다른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벗님들과 함께라면 오늘도 분명 의미와 재미가 가득한 날이겠구나. 걱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반가운 마음만 남았습니다.
맛있는 식사 든든하게 함께하고 싶어서 욕심을 내 마지노선까지 고민과 검색을 거듭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한 끼 즐겁게 드셔주셔서 기뻤습니다. 자연스러움과 조화로움, 오랫동안 이어져내려온 궁중음식이라는 이야기를 한 끼 식사 안에서 발견하는 시간이 되셨기를 바라봅니다.

❶  감물리, 김진한 농부님 (다랑 협동조합)

이어서 걸음을 옮긴 곳은 단양면 감물리의 다랑 협동조합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니 김진한 농부님이 저희를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논길을 따라 걷는데 눈이 쉴 틈이 없었습니다. 추수를 앞두고 고개를 숙인 벼가 환하게 펼쳐진 논 그 자체도 충분히 멋진데, 그 논들이 층층이 쌓여 하늘 그리고 산과 어우러지니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이 아름다운 논을 일컫는 이름은 ‘다랑논입니다. ‘다랑이’는 지탈진 산골짜기에 있는 층층으로 된 좁고 작은 논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보통의 다랑논은 산기슭이나 큰 산의 면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찾은 감물리의 다랑논은 독특한 분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옛 물길 따라, 논 농사를 이어가는 감물리.
논의 핵심은 물을 다루는 것이라는데요. 감물리는 아직 옛 물길이 살아있어 지하수 없이도 자연스러운 논 농사가 가능한 곳입니다. 이 물길은 혼자 잡지 않는다고 합니다. 논으로 물길을 이어가는 여러 농가가 모여야만 합니다. 논은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물을 전하는 역할을 겸한다는데요. 한 지역에 물이 부족하더라도 논을 통해 물을 이동시킬 수 있으니 모든 농가가 산의 물을 공유하며 함께 농사지을 수 있습니다.
물길을 따라 찾는 다른 친구들도 농부들의 든든한 아군이 됩니다. 논에 사는 새우는 제 명을 다하면 좋은 자연 퇴비가 되고, 벼를 해치는 멸구가 논을 찾더라도 그 천적인 거미가 있기에 논의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논에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져 함께 살수록 자연도, 농부도 더 지속가능할 수 있습니다.
다랑논의 특성상 큰 기계가 진입하기 어려워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다랑논협동조합에는 또 다른 가능성이 되었습니다. 비료와 농약에 적응해 그들이 없으면 농사짓기가 어려운 개량종 벼 대신, 자연농으로 토종벼 농사를 짓는 방식을 선택하신 거죠.
농부님께선 10년을 농사 지었으면 전문가라고 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일기를 맞추지 못하겠다며, 이제는 언제 심고 거두어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심어야 할지를 고민한다는 현실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수십년 사이에 빠르게 개발된 쌀에 비해 수천년 동안 자생해온 토종씨앗 안에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 들어있을거라는 농부님의 말씀에서 씨앗의 가능성을 살핍니다.
한편, 본래 감물리는 일대에 나무 한 그루 없이 모두 논이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10년 이상 논이 방치된 지금은, 논이 육지화되어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데요. 농사지을 수 있는 20만평의 땅 중 20%만이 논밭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마저도 70대 이상 농가 네 곳에 기대고 있는 상황이라니. 농사짓는 사람이 사라지고, 농지가 사라지는 것이 이제는 당연해진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다랑논 한 곳이 없어지면 한 농가가 그 지역 전부의 물길을 잡아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요.
'지속가능’을 ‘장기적 활력’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야 한다는 어느 농부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하수를 틀어 논에 물을 대는 것은 짧은 미래에까진 유지될 수 있겠지만, 그건 결국 아랫돌을 빼어다 윗돌을 괴는 것과 다름없는 방법인 듯합니다. 비료와 농약에 적응해 그것이 있어야만 자랄 수 있는 벼 이전에는 그 약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농부가 있고, 그 농부 이전에는 저렴한 값에 많은 양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가 있습니다.
오래도록, 더 많은 존재들이 활력있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선 어떤 오늘의 실천이 필요할까요?
감물리 다랑논의 물길과, 그 길을 따라 사는 여러 생물들, 그 생물에 기대어 튼튼하게 자라는 토종벼, 그리고 그 논을 돌보는 농부와 그 농부의 쌀이 오른 식탁. 이 유기적인 순환 속에서 분명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농부님께서 농사지은 귀도, 화도, 진안도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반찹쌀의 특성을 지녀 인기가 좋다는 귀도, 밥맛은 끝내주지만 벼가 잘 쓰러져 재배난도가 높아 토종벼 농부들에게 전설의 쌀로 통한다는 화도, 올해 대량화에 성공한 진안도까지. 기록에 따르면 1500여종에 달하는 토종벼 중 밀양이라는 지역에 가장 잘 적응해 자랄 수 있는 토종벼를 찾고,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양으로 재배하기까지의 시간이 쌓여 맺힌 쌀이라고 생각하니 한 톨 한 톨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❷ 태룡리, 김소영 농부님

전날 미리 태룡리에 들러 농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빛으로 반짝이는 가로등, 아니 비닐하우스를 맞이합니다. 깻잎 하우스입니다. 밀양 단장면 대부분의 비닐하우스에서는 깻잎이 자란다고 합니다. 해가 짧아지면 깻잎이 금세 꽃을 맺어서 밤에 불을 켜 계절감을 잊게 하는 것이지요.
(출처: 국제신문)
밀양은 전국 깻잎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봄에 파종해 가을에 거두는 들깨와는 달리, 깻잎은 늦여름에 파종해 이듬해 봄까지 수확합니다. 한 번 심어 여러 계절을 꼬박 거둘 수 있는 덕에, 밀양에서는 연세가 많은 7-80대 농부님도 깻잎 농사를 짓습니다. 김소영 농부님의 농사 선생님도 단장면의 동네 어르신이었다고 하셔요. 노지 길 옆 밭에서 씨를 뿌려 솎는 것부터 한 작기를 배운 뒤, 수 년이 지난 지금은 한살림에도 깻잎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새로 생긴 한살림 밀양 지점에 있는 깻잎이 제주산인 것을 보고, 농부님께서 깻잎 최대 산지인 밀양에서 밀양의 깻잎이 공급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남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제안에 적극적인 활동가분의 노력이 더해져 푸드마일리지가 대폭 낮은 밀양의 깻잎이 매장에 공급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참 좋은 변화로 느껴졌어요.
"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아침에 설레며 오는 건 농사가 처음이에요. 그게 좋아요.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생물이라 변수가 많지만, 그래서 좋은 것도 있어요. “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농부님이 마주하실 깻잎밭의 풍경을 눈에 담아봅니다.
한편, 경기도에 사는 저는 깻잎과 상추를 사려 생협 매장이 여는 시간에 맞추어 줄을 서곤 합니다. 선선한 봄과 가을이 아니면 저희 집 앞 생협 매장에서 잎채소 사기는 하늘의 별따기에요. 한 명 당 수량이 하나로 정해진 경우도 많고요. 길고 더운 여름을 보내면서 농부님께서도 올해는 여름이 너무 뜨거워 상추 꽃이 너무 빨리 피는 바람에 잎채소 재배가 힘들었다는 이야길 전해주셨는데요. 무더운 여름날이 이어질수록 사시사철 마트에서 만나는 상추가 점점 낯설어집니다.
깻잎 줄기는 계절을 지나며 쑥쑥 자라 사람 허리 위까지 자랍니다. 오래 잘 키운 농가의 깻대는 대나무처럼 굵다고 합니다. 씨를 받는 들깨 포기는 잎을 떼지 않고 키워 마디가 길지만, 깻잎을 위한 포기는 한 단이 새끼손가락 마디보다 짧아서 깻잎을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고도 해요.
특별하게도 김소영 농부님의 깻잎 하우스 옆에는 꾸지뽕 나무들이, 맞은편에는 파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귀농 7년차 농부님께선 다른 농부님 세 분과 함께 농사 짓고 계셨는데요. 같이 농사짓는 분들이 밀양에 뿌리내리게 해 준 고마운 분들이라고 이야기해주셨어요. 그 뒤론 여러 작물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자라는 모습이 더욱 정답게 느껴졌습니다. 농장을 나오면서 생태미식학과 벗님께서 건네주신 꾸지뽕에서는 유난히 환한 달콤함이 감돌았습니다.

❸ 남산리, 구배기된장

넘치게 채운 대화에, 시간이 모자라 서둘러 향한 곳은 남산마을의 구배기된장입니다. 메모장을 열어보니 띄엄띄엄 적힌 기록이 눈에 띕니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발로 꾹꾹 다져서 메주를 만들어야 좋다는 말씀에, 들어가자마자 정신없이 한이 님의 도움으로 메주콩을 으깨고, 눈 깜짝할 새 네 덩어리 메주를 완성했어요. 이게 이렇게 빨리 완성되는 건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콩 위에 선 한이 님이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붙잡아주신 다른 벗님의 손도 너무나 다정했습니다. 혼자라면 무리지만, 함께라면 즐거움이 된다는 걸 김 나는 메주에서 배웠습니다.
메주는 꼭 찬바람이 불 때 만들어야 상하지 않는다는 것, 고봉으로 두부상자에 콩을 세 번 담아 완전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삶은 뒤, 틀에 보자기를 깔고 콩을 넣어 밟으면 된다는 이 모든 가르침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쏜살같이 흘러나왔습니다. 말씀해주시는 대로 받아 적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9월 그믐에 만들어 어린이날에 장을 뜬다는 이 시간의 흐름이 새롭게 느껴졌어요.
결국은 "장이 맛있으면 음식 걱정 없고, 김치 맛있으면 반찬 걱정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끝으로 된장 만들기에 돌입했습니다.
자원해주신 벗님들의 손길로 된장이 만들어지는 동안, 한켠에서는 고구마와 김치 시식이 이어졌습니다.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자마자 "와! 맛있다!"는 감탄이 연달아 터져 나왔습니다. 김치의 핵심은 배추를 절이는 것이라는 말씀에서 요리에 대한 선생님의 신념이 어렴풋이 느껴졌습니다.
고추장, 집장, 보리 쌈장도 시식해보았습니다. 깔끔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었어요. 이 장들과 함께라면 음식 맛 걱정은 없을 것만 같습니다.
올해 6월 일본에 가 7대 째 이어오는 미소 장인의 작업실에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다섯 종류의 미소를 테이스팅하고, 미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부끄러움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나라 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이었던 것 같아요. 당연하게 먹어왔기 때문에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는 생각보다는, 가깝기 때문에 더욱 깊이 알아가고 싶다는 작은 다짐을 해보았던 때였습니다. 이 맘을 이어 도착해서 인지 더 반갑게 느껴지는 구배기된장이었습니다.
가을에 찾은 이곳에서 콩으로 만든 뜨끈한 벽돌과, 그 벽돌이 발효되어 만들어지는 메주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날 추워지면 장도 만들고 김장도 하러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 덕에 머잖아 찾아올 구체적인 배움의 과정을 기약해봅니다.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엔 큰 차이가 있겠지요. 가마솥에 삶은 콩, 장독에서 익어가는 장, 그렇게 자연과 사람의 합작으로 만들어지는 마법 같은 맛이 더 멀리까지 이어지기를, 알면 많이 들리고 보이는 것들이 더욱 많이 생겨나기를 바라봅니다.

농가행 이후, 무엇을 만들어 볼까?

짧지만 알찼던 밀양에서의 농가행 이후에는 온라인으로 만나는 시간을 가졌어요. ‘밀양의 자연, 사람, 음식을 잇는 생태미식 기록지’를 팀별로 작성하면서 로컬플레이트 콘셉트와 재료를 정하고, 메뉴와 전시/플레이트 스토리를 구상했답니다. 지난 농가행에서 다랑협동조합 김진한 농부님께 받은 쌀을 가지고 요리를 하자는 팀도 있었고, 마치 여행 같았던 지난 농가행의 기억을 더듬으며 여행자를 위한 도시락을 만들고 싶다는 팀도 있었죠.
지난 시간 동안 듣고 배운 이야기를 우리 일상으로 가져간다면, 어떤 음식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밥 짓는 손, 장을 담그는 손, 깻잎을 따는 손을 떠올리며 우리의 식탁과 소비, 선택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것— 그것이 생태미식학과가 지향하는 다음일 것입니다.
글·사진 | 벗밭